산불이 남긴 건 재가 된 숲만이 아니었습니다. 그 불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침입해 흔적을 남겼죠. 병동 안, 불이 꺼진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타오르는 공포와 울음을 껴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.
“선생님, 저... 아직도 타는 냄새가 나요.” 이 말 한마디는 단순한 ‘충격’일까요? 아니면 진짜 ‘정신질환’일까요?
간호사로서 산불 생존자들과 함께하며 알게 된 트라우마와 PTSD의 경계선,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.
"트라우마는 본능, PTSD는 뇌의 기억 고장"
산불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려볼까요? 붉은 불길, 타들어가는 소리, 숨이 막힐 듯한 연기. 그 순간 사람들의 뇌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가득 찼습니다. 그래서 화재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종종 말합니다. “불길은 꺼졌는데, 제 안에서는 아직 꺼지지 않았어요.” 그건 무엇일까요?
‘트라우마’란, 뇌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. 손을 데었을 때 피부가 빨개지듯, 마음도 상처를 입으면 반응을 보입니다. 불면, 악몽, 불안, 눈물… 모두 회복의 과정이에요.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반응이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진다면? PTSD(Post-Traumatic Stress Disorder),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.
PTSD는 뇌가 '그날의 기억'을 고장 낸 상태입니다. 기억이 마치 고장 난 레코드처럼 계속 재생되고, 자극 하나하나에 감정이 폭발하죠. 이게 바로 trauma와 PTSD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. 누구나 트라우마는 겪지만, PTSD는 누구에게나 오는 건 아닙니다. 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가까워요.
산불 속 두 사람, 하나의 사건, 두 개의 뇌 반응
2023년 강원도 산불 당시, 저는 대피소와 정신과 병동을 오가며 다양한 환자들을 만났습니다. 그 중 기억에 남는 두 사람. 같은 산불, 전혀 다른 반응.
첫 번째, 60대 여성 환자 A씨. 자신이 키우던 반려견과 집을 한순간에 잃고 말을 잃은 채 입원하셨죠. 처음엔 눈물도 없고, 대답도 없고…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말을 트시고, 가족과도 웃으며 대화하셨습니다. 이건 회복 중인 ‘트라우마’였습니다.
두 번째는 10대 남학생 B군. “불타는 사람을 봤어요. 눈앞에서요.” 그 충격은 단순히 지나가지 않았습니다. 두 달, 세 달이 지나도 불면증, 공황, 외출 회피, 망상에 가까운 환각까지. “모닥불을 봤는데 불이 살아있는 것 같았어요.” 이건 단순 트라우마가 아닌, PTSD 진단을 피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.
같은 사건인데 왜 반응은 이렇게 다를까요? 바로 뇌의 회복 능력, 개인의 경험, 그리고 심리적 기반의 차이 때문이에요. 그래서 산불처럼 예측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는, 누가 PTSD를 겪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. 그렇기에 모두가 대비하고, 스스로를 관찰해야 하죠.
"나도 혹시 PTSD?" 간호사가 알려주는 자가 체크 리스트
정신병? 아니요. PTSD는 감정이 멈춘 사람의 구조 요청입니다. 진단은 의사가 하지만, 첫 발견은 자기 자신일 수 있습니다. 그래서 저는 환자들에게, 혹은 가족들에게 자주 묻습니다. “이런 증상, 혹시 3개 이상 해당되시나요?”
PTSD 자가체크 6가지 질문
- 자꾸 당시 기억이 떠오르고 멈추지 않는다.
- 타는 냄새, 불빛 등 비슷한 자극에 강한 반응을 보인다.
- 잠을 잘 수 없고 악몽을 자주 꾼다.
- 감정이 무뎌졌거나 무기력해졌다.
-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거나 단절했다.
- 사소한 자극에도 과하게 놀라고 예민해진다.
이 중 3개 이상이라면, 뇌는 지금도 ‘경계 상태’일 수 있습니다.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조기에 대처하면 회복은 훨씬 빠릅니다. 약물, 인지치료, EMDR, 음악치료 등 간호사와 함께하는 심리 회복 프로그램도 많이 있죠. 무엇보다 중요한 건 "나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다"는 걸 아는 것입니다.
결론: 꺼지지 않은 불, 멈추지 않는 감정
불은 꺼졌지만, 기억은 타오르고 있습니다. 누군가는 스쳐 지나간 사건이고, 누군가에겐 지금도 반복되는 악몽입니다.
트라우마는 몸의 반사신경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, PTSD는 그 반사가 멈추지 않는 상태입니다.
그 차이를 빨리 인식하고,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. 그게 우리가 마음속 산불을 진화하는 첫 걸음입니다.
혹시 당신 마음속에도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면, 지금 조용히 손을 들어주세요.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.